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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일체유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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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효신 조회 2,797회 작성일 2011-12-04 19:54본문
일체유심조의 방법론으로서 제물론
이제 소요유 편을 끝내고 제물론(齊物論) 편으로 들어갈 차례이다. 제물론 편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의 우화’,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세계적 작곡가로 자리매김토록 한 작품 이름인 ‘호접몽(胡蝶夢, 나비의 꿈)’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나비의 꿈은 제물론의 결정판이라고 할 정도로 이 짧은 글에 장자사상이 함축적으로 잘 담겨져 있어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내용이다. 그렇다고 제물론을 쉽게 접근했다가는 큰 코를 다친다. 장자서 내용 가운데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글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 해설서 중 적지 않은 책들이 제물론 해석의 어려움으로 인해 장자사상을 우리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적당히 해석하면서 제물론을 어영부영 한 채로 넘어갈 수는 없다. 장자서의 가장 핵심적 내용을 제물론이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서의 다른 장은 몰라도 제물론 편만은 정확히 이해해야만 장자사상의 깊은 맛을 비로소 느낄 수 없다. 어쩌면 제물론 편만 제대로 이해하면 장자서의 나머지 장들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장자가 말하려는 바가 제물론 편에 총체적으로, 또 함축적으로 언급되어 있어서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제물론은 중국철학사의 최고봉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사상서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빼어난 내용들로 구성된 으뜸의 사상서이다.
제물(齊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물(物)’을 ‘제(齊)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제(齊)한다’는 것은 ‘같게 하다’, ‘가지런히 하다’, ‘하나로 하다’의 의미를 지니기에 제물이란 ‘사물을 고르게 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세상 만물은 크기나 색깔, 또 그 느낌마저 다르기에 제물의 상태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드러난 외형은 다를지라도 우리들의 마음에서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공자가 완성된 인간의 모습으로 말한 이순(耳順) 상태, 즉 좋은 소리나 싫은 소리나 똑같이 들리는 상태도 이런 경우에 속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의 해법을 찾는 것이 바로 제물론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내용이다.
물론 장자가 말하는 제물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대상을 하나로 해서 서로 다른 사물들을 일률적으로 획일화 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로 하다’에서 ‘하나’는 획일화 된 하나가 아니라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의 의미를 지닌 하나이다. 그래서 ‘하나로 하다’는 이것과 저것 중에서 한 쪽을 택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시비를 초월한 세계, 즉 ‘제일(齊一)’, ‘제동(齊同)’, ‘여일(如一)’의 세상이다. 제물론 편은 이런 식으로 세상만물이 우리들 마음에서 어떤 차별이 생겨나지 않은 채 고르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 지를 끊임없이 찾으려고 하는 장이다.
그렇다면 제물(齊物)은 불가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개념과 흡사하지 않은가? 사실이 그렇다. 일체유심조는 중국 선불교를 완성시킨 육조 혜능선사로부터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건너온 대승불교와 중국 전통사상인 노장사상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중국 선불교 임을 감안하다면 일체유심조의 개념도 바로 장자사상에서 기원한다고 말지 않을까? 그렇다면 제물과 일체유심조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 선불교의 일체유심조에선 거기에 이르는 노하우(know-how), 즉 소프트웨어를 딱 부러지게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우리들 마음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데 일체유심조 경지에 이르려면 과연 어떻게 수양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학습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전이 없다. 이에 반해 장자는 제물론을 통해 일체유심조에 이르는 명쾌한 해법을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제물론은 일체유심조에 이르는 일종의 방법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렇게 접근해야만 난해한 것으로 유명한 제물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물을 고르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사물들 간에 어떤 차별이 일어나지 않게 똑같이 보이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마음에서 차이가 있는 사물들을 어떻게 똑같이 보이도록 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장자가 제물론 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다. 사물의 한 쪽만 보는 우리들의 분석적·이분법적·즉물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 장자가 말하는 해법이다. 바로 이것이 사물을 총체적으로 보고자 하는 도(道)의 관점인 것이다. 도의 관점에서 볼 때 외물에서 드러난 차이란 상대적 차이일 뿐 절대적 차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들 몸 안의 간과 쓸개도 가깝게 붙어 있지만 이것은 절대적 기준에 따른 거리 차이가 아니다. 다른 기준에서 본다면 간과 쓸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일 수 있다. 그래서 장자는 현실 세계의 갖가지 현상, 그 중에서도 시비(是非)·선악(善惡)·미추(美醜)·정사(正邪)·화복(禍福)·길흉(吉凶)·각몽(覺夢)·생사(生死) 등을 명확히 구분하려 하는 상대적 가치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가를 밝히면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대붕(大鵬), 즉 절대자(또는 자유인)의 조건은 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고, 궁극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입장을 취한다. 나아가 그런 절대자의 생활을 성립시키는 논리, 인간이 어떻게 절대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실천적 근거를 밝힌다.
그렇다면 제물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것은 주자학의 핵심 뼈대인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아닐까? 격물치지란 사물들 간에 드러난 차이를 통해 앎에 이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사물의 상에서 나아가 그 사물을 탐구해서 사물의 이치를 직접 연구하는 공부를 의미해서이다. 이는 제물은 물론이고, 일체유심조와 같은 불교의 내성적인 수양론과 대립되는 방법이다. 이처럼 주희는 노장사상과 불교에 맞서서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업데이트 하려고 주자학을 만든 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 노장사상과 불교란 주관적 관념론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사상과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든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유체계라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장자는 제물론을 말하면서 유일하게 ‘론(論)’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이다. 총 33편에 이르는 장자서 중에서 ‘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제물론이 유일하다. 이는 장자가 제시하는 제물을 통해 일체유심조에 도달하는 것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다면 제물을 통하지 않고서도 일체유심조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얼마든지 열어둔 것이다. 주자의 격물치지도 그 중의 하나일 텐데 겸손함이 짙게 배어나는 표현이다. 그런데 제물을 통한 일체유심조의 방법이 바로 중국 선불교가 말하고자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장자 제물론은 불가의 일체유심조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업그레이드한 마음공부 소프트웨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소요유 편을 끝내고 제물론(齊物論) 편으로 들어갈 차례이다. 제물론 편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의 우화’,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세계적 작곡가로 자리매김토록 한 작품 이름인 ‘호접몽(胡蝶夢, 나비의 꿈)’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나비의 꿈은 제물론의 결정판이라고 할 정도로 이 짧은 글에 장자사상이 함축적으로 잘 담겨져 있어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내용이다. 그렇다고 제물론을 쉽게 접근했다가는 큰 코를 다친다. 장자서 내용 가운데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글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 해설서 중 적지 않은 책들이 제물론 해석의 어려움으로 인해 장자사상을 우리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적당히 해석하면서 제물론을 어영부영 한 채로 넘어갈 수는 없다. 장자서의 가장 핵심적 내용을 제물론이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서의 다른 장은 몰라도 제물론 편만은 정확히 이해해야만 장자사상의 깊은 맛을 비로소 느낄 수 없다. 어쩌면 제물론 편만 제대로 이해하면 장자서의 나머지 장들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장자가 말하려는 바가 제물론 편에 총체적으로, 또 함축적으로 언급되어 있어서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제물론은 중국철학사의 최고봉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사상서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빼어난 내용들로 구성된 으뜸의 사상서이다.
제물(齊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물(物)’을 ‘제(齊)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제(齊)한다’는 것은 ‘같게 하다’, ‘가지런히 하다’, ‘하나로 하다’의 의미를 지니기에 제물이란 ‘사물을 고르게 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세상 만물은 크기나 색깔, 또 그 느낌마저 다르기에 제물의 상태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드러난 외형은 다를지라도 우리들의 마음에서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공자가 완성된 인간의 모습으로 말한 이순(耳順) 상태, 즉 좋은 소리나 싫은 소리나 똑같이 들리는 상태도 이런 경우에 속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의 해법을 찾는 것이 바로 제물론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내용이다.
물론 장자가 말하는 제물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대상을 하나로 해서 서로 다른 사물들을 일률적으로 획일화 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로 하다’에서 ‘하나’는 획일화 된 하나가 아니라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의 의미를 지닌 하나이다. 그래서 ‘하나로 하다’는 이것과 저것 중에서 한 쪽을 택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시비를 초월한 세계, 즉 ‘제일(齊一)’, ‘제동(齊同)’, ‘여일(如一)’의 세상이다. 제물론 편은 이런 식으로 세상만물이 우리들 마음에서 어떤 차별이 생겨나지 않은 채 고르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 지를 끊임없이 찾으려고 하는 장이다.
그렇다면 제물(齊物)은 불가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개념과 흡사하지 않은가? 사실이 그렇다. 일체유심조는 중국 선불교를 완성시킨 육조 혜능선사로부터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건너온 대승불교와 중국 전통사상인 노장사상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중국 선불교 임을 감안하다면 일체유심조의 개념도 바로 장자사상에서 기원한다고 말지 않을까? 그렇다면 제물과 일체유심조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 선불교의 일체유심조에선 거기에 이르는 노하우(know-how), 즉 소프트웨어를 딱 부러지게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우리들 마음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데 일체유심조 경지에 이르려면 과연 어떻게 수양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학습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전이 없다. 이에 반해 장자는 제물론을 통해 일체유심조에 이르는 명쾌한 해법을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제물론은 일체유심조에 이르는 일종의 방법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렇게 접근해야만 난해한 것으로 유명한 제물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물을 고르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사물들 간에 어떤 차별이 일어나지 않게 똑같이 보이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마음에서 차이가 있는 사물들을 어떻게 똑같이 보이도록 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장자가 제물론 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다. 사물의 한 쪽만 보는 우리들의 분석적·이분법적·즉물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 장자가 말하는 해법이다. 바로 이것이 사물을 총체적으로 보고자 하는 도(道)의 관점인 것이다. 도의 관점에서 볼 때 외물에서 드러난 차이란 상대적 차이일 뿐 절대적 차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들 몸 안의 간과 쓸개도 가깝게 붙어 있지만 이것은 절대적 기준에 따른 거리 차이가 아니다. 다른 기준에서 본다면 간과 쓸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일 수 있다. 그래서 장자는 현실 세계의 갖가지 현상, 그 중에서도 시비(是非)·선악(善惡)·미추(美醜)·정사(正邪)·화복(禍福)·길흉(吉凶)·각몽(覺夢)·생사(生死) 등을 명확히 구분하려 하는 상대적 가치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가를 밝히면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대붕(大鵬), 즉 절대자(또는 자유인)의 조건은 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고, 궁극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입장을 취한다. 나아가 그런 절대자의 생활을 성립시키는 논리, 인간이 어떻게 절대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실천적 근거를 밝힌다.
그렇다면 제물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것은 주자학의 핵심 뼈대인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아닐까? 격물치지란 사물들 간에 드러난 차이를 통해 앎에 이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사물의 상에서 나아가 그 사물을 탐구해서 사물의 이치를 직접 연구하는 공부를 의미해서이다. 이는 제물은 물론이고, 일체유심조와 같은 불교의 내성적인 수양론과 대립되는 방법이다. 이처럼 주희는 노장사상과 불교에 맞서서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업데이트 하려고 주자학을 만든 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 노장사상과 불교란 주관적 관념론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사상과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든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유체계라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장자는 제물론을 말하면서 유일하게 ‘론(論)’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이다. 총 33편에 이르는 장자서 중에서 ‘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제물론이 유일하다. 이는 장자가 제시하는 제물을 통해 일체유심조에 도달하는 것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다면 제물을 통하지 않고서도 일체유심조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얼마든지 열어둔 것이다. 주자의 격물치지도 그 중의 하나일 텐데 겸손함이 짙게 배어나는 표현이다. 그런데 제물을 통한 일체유심조의 방법이 바로 중국 선불교가 말하고자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장자 제물론은 불가의 일체유심조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업그레이드한 마음공부 소프트웨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