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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심재 - 불꺼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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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효신 조회 2,226회 작성일 2011-12-04 19:56

본문

마른나무와 같은 감관(感官), 불 꺼진 재와 같은 심관(心官)


흔들리는 갈대는 때 아닌 바람에 쉽게 꺾이는 것처럼 미묘한 음색은 주의를 조그만 흩뜨려도 이내 우리들의 감정을 바꾼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보다 더 연약하고, 무수한 현을 타는 거문고의 음색보다 더 미묘하다. 누군가 태어나면 기뻐하다가 죽으면 슬퍼하고, 사랑하면 즐거워하다가 헤어지면 괴로워한다. 어디 그 뿐인가. 우정을 굳게 약속했던 친구와 틀어지면 낙담하고, 신뢰로 결속되었던 동지가 따르지 않으면 미워하기도 한다. 게 중에는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는 사소한 것들도 많은데 우리들 마음이 워낙 변덕스럽다보니 온갖 감정들을 쉴 새 없이 뿜어낸다. 장자는 이런 변덕스러운 마음을 대지의 퉁소소리(지뢰地籟)에 비유한다.
대지의 퉁소소리란 바람이 만드는 소리이다. 깊은 숲 속에 있는 큰 나무들의 구멍들은 그 생김에 따라 더러는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술병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좁은 웅덩이와도 같다. 그런데 대지가 숨을 내쉬면 숲 속 모든 나무들의 구멍들은 온통 악기로 변하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다른 소리를 낸다. 그래서 각각의 구멍에서는 콸콸 물이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이 나는 소리, 나직이 꾸짖는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으며 곡하는 소리, 깊은 데서 울려 나오는듯한 소리, 새가 재잘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장자는 이런 소리들을 가리켜 우리들이 살아가며 뿜어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에 비유했다.
그렇지만 대지의 퉁소소리는 바람만 멎으면 이내 잠잠해진다. 심지어 언제 그런 소리를 냈느냐고 시치미를 뚝 떼면서 산들바람에 의해 살랑살랑 나뭇가지만 흔들어 보인다.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평생 불어대는 사람의 퉁소소리(인뢰人籟)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평생 희로애락의 퉁소소리를 쉴 새 없이 불며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이다. 만나면 반가워하고, 떠나면 서운해하고, 욕망을 이루면 즐거워하고, 욕망을 포기하면 괴로워한다. 이런 희로애락의 감정들은 하늘의 퉁소소리(천뢰籟)를 의식하지 못하는데서 빚어진다. 만약 우리들이 하늘의 퉁소소리를 느낄 수 있다면 콸콸 물이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이 나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으며 곡하는 소리들을 모두 같은 소리라고 여겨 굳이 다른 소리를 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무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왜 이렇게 구분되어져 우리들의 귀에 들리는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감관(感官)작용과 심관(心官)작용의 결과 때문이다. 평소 우리들은 감관과 심관을 활짝 열어놓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보고(시視), 듣고(청聽), 맛보고(미味), 또 보고, 듣고 맛본 것들의 의미를 곰씹으면서 오늘 하루가 즐거웠는지, 괴로웠는지를 판별하곤 한다. 예를 들어 ‘초일류라는 평을 듣는 호텔(聽)’의 ‘전망 좋은 레스토랑(視)’에서 ‘미각을 자극하는 좋은 식사(味)’를 경험하면 오늘 하루는 즐거웠다고 하고, ‘저자거리(聽)’의 ‘허름한 식당(視)’에서 싸구려 음식(味)을 먹었다면 오늘 하루는 즐겁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느끼는 행복은 이런 식으로 객관화할 수 없다. 호텔 레스토랑이 저자거리 식당보다 좋고, 비싼 식사가 싸구려 식사보다 맛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거리의 싸구려 식당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게 중에는 돈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부자들도 있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은 최소한 미각 선택과 관련해서는 자의적으로 감관작용을 멈춘 사람들이다. 청각도 마찬가지이다. 청각을 열어 놓으면 나무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서로 구분되어져 들릴 것이고, 청각을 닫으면 소리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 같게 들릴 것이다. 이에 장자는 감관작용이 멈추어진 상태를 ‘마른나무와 같은 몸(고목지형槁木之形)’에다 비유한다.
그렇다면 마른나무와 같은 몸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는 우리들이 감관을 통해 대상을 바라볼 때 그 작용을 마른 나무처럼 무미건조하게 느끼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차이는 이내 소멸되어 물질적으로 재산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그 차이가 없어져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보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조그마한 차이조차도 가능한 크게 보면서 부자와 나, 권력자와 나를 애써 구분하면서 스스로를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리거나 아니면 조그마한 성취에 도취되어 거기서 행복을 추구하려고 든다. 결국 이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들 인생을 엄청난 희로애락의 무대에 내던져지게 만든다. 이는 감관을 마른나무처럼 하여 대상을 덤덤하게 보는 게 아니라 대상에 갖은 조미료를 뿌려대어 온갖 의미를 갖다 붙인 결과이다.
그런데 장자는 감관작용의 멈춤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심관작용의 멈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불 꺼진 재와 같은 마음(사회지심死灰之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심관작용을 불 꺼진 재처럼 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감관에서 전해 온 대상을 마음에서 해석할 때 어떤 의미작용을 이루지 말라는 의미이다. 많으니까 좋고, 붉은 색이니까 정열적이라 식의 의미해석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심재(心齋, 마음 굶김)의 상태이다. 심재 상태에 이르면 외부 대상의 성질이나 성격 등이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소리가 크든 작든 간에 내 귀에는 똑같은 소리로 들리고, 크기가 길든 짧든 간에 내 눈에는 똑같은 모양으로 보인다.
이제 감관과 심관작용을 모두 멈추면 몸은 존재하지만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 장자는 이 상태를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荅焉似喪其耦)’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자기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린 상태는 불가에서 말하는 지관(止觀)의 상태가 아닐까? 불가에서 명상할 때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를 유지하라고 가르치는데 산스크리스트어로 사마타(śamatha)이다. 그러면 거기서 사물에 대한 직관과 통찰이 생겨나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비파샤나(vipaśyanā)라고 부른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조용하게 가라앉은 것이 정(定)이고, 그렇게 눈이 밝아진 것이 혜(慧)이므로 이를 정혜(定慧)라고도 한다. 이른바 삼매(三昧, samādhi)와 반야(般若, prajňā)이다.
이 단계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비운 상태, 이른바 상아(喪我, 나를 죽임), 망아(忘我, 나를 일어버림), 무아(無我, 내가 없음)의 경지에 들어선 상태이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비로소 우리들은 하늘의 퉁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곧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차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얻는 단계이다. 인생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희로애락의 퉁소소리를 불어대는 인간들은 언제 이런 단계에 이를 수 있을까? 대지의 바람이 사라지면 대지의 퉁소소리가 끊기는 것처럼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인간의 퉁소소리를 스스로 멈출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