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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커다란 앎과 조그만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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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효신 조회 1,841회 작성일 2011-12-04 19:57본문
큰 지혜는 여유롭고(大知閑閑), 작은 지혜는 촘촘하다(小知閒閒)
모든 것이 깨어나 있는 낮에는 활동을 시작하기에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쉴 새가 없다. 밤이 되어도 쉴 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은 한가할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밤이 되면 잠들게 되는데 잠들면 꿈을 꾸기에 우리들의 마음은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쉴 새가 없다. 이렇게 우리들의 마음은 밤낮 가릴 것 없이 쉴 틈이 없다. 어디 그 뿐인가. 다른 사람과 만나면 다툴 때가 적지 않은데 이럴 경우 지지 않으려고 우리들의 마음이 또 얼마나 바빠지는가. 그렇다고 혼자가 되더라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혼자 있을 때도 마음 속으로 수많은 전쟁을 치루곤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자화상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 부드러운 표정 속에 간교함을 감추고, 말 속에 함정을 파 놓으면서 속마음을 깊이 감추어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조금 놀라면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크게 놀라면 기절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러니 우리들의 마음에 쉴 틈이 어디 있을 수나 있을까?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까? 장자는 ‘큰 지혜(대지大知)’를 지닌 사람과 구분하여 이를 ‘작은 지혜(소지小知)’를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태라고 꼬집는다.
장자는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는 일상에서 행하는 우리들의 말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작은 지혜의 소유자는 주로 시시콜콜 따지는 식의 작은 말들이어서 대범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꼼꼼하고 세세하다(한한閒閒). 그래서 장자는 이들이 쏘아대는 말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활처럼 쏜살같다고 한다. 이는 상대방의 허점을 틈타 시비를 따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지킨다고 하는 약속은 마치 혈서를 쓰듯이 맹서한다고 한다. 이는 필사적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태도를 지니기 때문이다.
결국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삶은 그 생명력을 빨리 잃고서 시들어간다. 장자는 이들의 시들어 감을 가리켜 가을이나 겨울 같다고 말한다. 봄의 생명력과 여름의 무성함이 만들어준 우리들의 제 모습을 날로 잃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자꾸 빠져 들어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우리들은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결코 회복할 수 없다. 그래서 마치 끈으로 꽁꽁 묶어 놓은 것처럼 우리들 마음의 문을 걸어서 잠근다면 바로 그것이 시들어가는 것이라고 장자는 말한다. 실제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의 마음을 다시 되살아나게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가. 사람과 부대끼며 서로 마찰을 일으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말 달리듯 지나가는데 이는 분명 서글픈 일이다. 또 평생을 발버둥 쳐도 이룬 공이 별로 없으며, 파김치가 되도록 일에 몰두하여 지치는데도 쉴 줄을 모르는데 이 또한 애달픈 일이다. 또 그의 몸이 늙어가고 마음 역시 그와 함께 시들어 가는데 이 또한 슬픈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를 보고 죽지 않았다고 말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제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은 본래부터 이렇게 아둔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만 혼자 아둔하고, 사람들 중에는 아둔하지 않은 이도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장자는 아둔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큰 지혜(대지大知)’를 지닌 사람이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깨어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나, 조금 놀라거나 크게 놀라거나 할 때나 언제든지 변하지 않고 여유롭고 담담하다(한한閑閑). 그래서 이들이 하는 말은 상대방 허점을 파고들지 않으며, 맹서도 누군가를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또 이들은 봄과 여름에 보여지는 것처럼 제 모습을 날로 회복한다. 그래서 큰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처신은 일단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는 그 몸을 손상치 않고 자연히 다해지기를, 즉 죽기를 기다리는 겸허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불 꺼진 재와 같은 마음(사회지심死灰之心)’이다. 사회지심이란 말 그대로 모든 활동을 상실한 마음으로서 심재(心齋)을 뜻한다. 심재는 『장자』 「제물론」의 주제어일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래서 「제물론」은 ‘불 꺼진 재’에다 자신의 마음을 비유한 남곽자기(南郭子綦)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음이 마치 불 꺼진 재와 같다는 표현은 심관(心官)작용이 멈추어진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심관작용을 멈춘다는 것은 감관을 통해 들어온 외부 대상들에 대해 어떠한 의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이 상태에 이르면 외물의 성질이나 성격 등이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다.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도 바로 이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은 심관작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이들은 감관작용을 통해 특정 소리만 듣기 좋아하고, 심관작용을 통해 일부 사물만을 마음에 간직하고선 다른 소리, 다른 사물에 대해서는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이런 태도는 감관과 심관이 작용하면서 우리들 마음에 분별이 생겨나고, 집착이 이루어지고, 충돌이 일어나기에 생겨난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감관작용과 심관작용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만약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듣지 않으면 우리들의 마음에는 외물만 남음으로써 외물에 대한 쓸데없는 지식만이 쌓인다.
반면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으면 우리들의 마음은 텅 비운 채로 담담한 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심재 상태이다. 심재 상태에 이르면 온갖 것들이 부침하는 세상 한가운데 있더라도 이런 변화들에 대해 무심하게 상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오랫동안 사물의 외면만을 쫓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삶이 그리 편안하지가 않다. 설령 몸이 안정된다 하더라도 정신은 계속 바쁘고 초조하다. 장자는 이를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달린다(坐馳)’는 것에 비유한다.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좌치의 상태에 있다.
모든 것이 깨어나 있는 낮에는 활동을 시작하기에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쉴 새가 없다. 밤이 되어도 쉴 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은 한가할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밤이 되면 잠들게 되는데 잠들면 꿈을 꾸기에 우리들의 마음은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쉴 새가 없다. 이렇게 우리들의 마음은 밤낮 가릴 것 없이 쉴 틈이 없다. 어디 그 뿐인가. 다른 사람과 만나면 다툴 때가 적지 않은데 이럴 경우 지지 않으려고 우리들의 마음이 또 얼마나 바빠지는가. 그렇다고 혼자가 되더라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혼자 있을 때도 마음 속으로 수많은 전쟁을 치루곤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자화상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 부드러운 표정 속에 간교함을 감추고, 말 속에 함정을 파 놓으면서 속마음을 깊이 감추어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조금 놀라면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크게 놀라면 기절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러니 우리들의 마음에 쉴 틈이 어디 있을 수나 있을까?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까? 장자는 ‘큰 지혜(대지大知)’를 지닌 사람과 구분하여 이를 ‘작은 지혜(소지小知)’를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태라고 꼬집는다.
장자는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는 일상에서 행하는 우리들의 말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작은 지혜의 소유자는 주로 시시콜콜 따지는 식의 작은 말들이어서 대범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꼼꼼하고 세세하다(한한閒閒). 그래서 장자는 이들이 쏘아대는 말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활처럼 쏜살같다고 한다. 이는 상대방의 허점을 틈타 시비를 따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지킨다고 하는 약속은 마치 혈서를 쓰듯이 맹서한다고 한다. 이는 필사적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태도를 지니기 때문이다.
결국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삶은 그 생명력을 빨리 잃고서 시들어간다. 장자는 이들의 시들어 감을 가리켜 가을이나 겨울 같다고 말한다. 봄의 생명력과 여름의 무성함이 만들어준 우리들의 제 모습을 날로 잃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자꾸 빠져 들어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우리들은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결코 회복할 수 없다. 그래서 마치 끈으로 꽁꽁 묶어 놓은 것처럼 우리들 마음의 문을 걸어서 잠근다면 바로 그것이 시들어가는 것이라고 장자는 말한다. 실제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의 마음을 다시 되살아나게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가. 사람과 부대끼며 서로 마찰을 일으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말 달리듯 지나가는데 이는 분명 서글픈 일이다. 또 평생을 발버둥 쳐도 이룬 공이 별로 없으며, 파김치가 되도록 일에 몰두하여 지치는데도 쉴 줄을 모르는데 이 또한 애달픈 일이다. 또 그의 몸이 늙어가고 마음 역시 그와 함께 시들어 가는데 이 또한 슬픈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를 보고 죽지 않았다고 말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제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은 본래부터 이렇게 아둔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만 혼자 아둔하고, 사람들 중에는 아둔하지 않은 이도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장자는 아둔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큰 지혜(대지大知)’를 지닌 사람이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깨어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나, 조금 놀라거나 크게 놀라거나 할 때나 언제든지 변하지 않고 여유롭고 담담하다(한한閑閑). 그래서 이들이 하는 말은 상대방 허점을 파고들지 않으며, 맹서도 누군가를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또 이들은 봄과 여름에 보여지는 것처럼 제 모습을 날로 회복한다. 그래서 큰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처신은 일단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는 그 몸을 손상치 않고 자연히 다해지기를, 즉 죽기를 기다리는 겸허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불 꺼진 재와 같은 마음(사회지심死灰之心)’이다. 사회지심이란 말 그대로 모든 활동을 상실한 마음으로서 심재(心齋)을 뜻한다. 심재는 『장자』 「제물론」의 주제어일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래서 「제물론」은 ‘불 꺼진 재’에다 자신의 마음을 비유한 남곽자기(南郭子綦)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음이 마치 불 꺼진 재와 같다는 표현은 심관(心官)작용이 멈추어진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심관작용을 멈춘다는 것은 감관을 통해 들어온 외부 대상들에 대해 어떠한 의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이 상태에 이르면 외물의 성질이나 성격 등이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다.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도 바로 이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은 심관작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이들은 감관작용을 통해 특정 소리만 듣기 좋아하고, 심관작용을 통해 일부 사물만을 마음에 간직하고선 다른 소리, 다른 사물에 대해서는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이런 태도는 감관과 심관이 작용하면서 우리들 마음에 분별이 생겨나고, 집착이 이루어지고, 충돌이 일어나기에 생겨난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감관작용과 심관작용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만약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듣지 않으면 우리들의 마음에는 외물만 남음으로써 외물에 대한 쓸데없는 지식만이 쌓인다.
반면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으면 우리들의 마음은 텅 비운 채로 담담한 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심재 상태이다. 심재 상태에 이르면 온갖 것들이 부침하는 세상 한가운데 있더라도 이런 변화들에 대해 무심하게 상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오랫동안 사물의 외면만을 쫓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삶이 그리 편안하지가 않다. 설령 몸이 안정된다 하더라도 정신은 계속 바쁘고 초조하다. 장자는 이를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달린다(坐馳)’는 것에 비유한다.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좌치의 상태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