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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말은 우리 몸 안에서 내뿜는 단순한 바람소리일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조회 1,799회 작성일 2013-08-12 13:35

본문

제목: 말은 우리 몸 안에서 내뿜는 단순한 바람소리일까?

원문)
말은 단순한 바람소리가 아니다. 말에는 무언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만약 말해지는 것에 특별히 정해진 의미가 없다면 말은 그저 바람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말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말을 어린 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우리들 몸 안에서 내뿜는 바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말 사이에는
정녕 구분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도는 무엇인가에 가리어져 진위가 생겨나는가?
말은 무엇인가에 가리어져 시비 판단이 생겨나는가?
도(道)는 어디에든 존재하고, 말은 무슨 뜻으로든 쓰이는 것이 아닌가?
도는 작은 이룸(小成)에 가리어지고, 말은 확신에 찬 화려한 언변(榮華)에 숨어든다.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의 시비가 생겨났으니 상대가 그르다고 한 것을 여기선 옳다고 하고, 상대가 옳다고 한 것을 저기선 그르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가 그르다는 것을 여기선 옳다고 하고, 상대가 옳다는 것을 저기선 그르다고 하려면 시비를 초월한 밝은 지혜(明智)를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夫言非吹也, 言者有言, 其所言者特未定也.
果有言邪? 其未嘗有言邪?
其以爲異於?音, 亦有辯乎, 其無辯乎?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故有儒墨之是非,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


새는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고 열심히 지저귄다. 내 귀에는 그냥 지저귀는 소리에 불과하지만 과연 새도 나처럼 생각할까? 새가 아니니까 이 점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옆 사람에게 말하는 소리를 새도 똑같이 지저귀는 소리로 듣는 것일까? 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는 당장 항변할 것이다. 당신은 새가 아닐진대 어찌 내가 말하는 소리를 그저 지저귀는 소리로 듣는가 하고. 하긴 그렇다. 내 귀에 지저귀는 소리로 들릴 뿐이지, 새도 나처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식의 의문은 우리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 성립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이다. 언어가 언어로써 성립할 수 있는 요건은 우리들이 언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전문적 용어를 빌린다면 언어라는 기표(記表, signifier)에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 즉 기의(記意, signified)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만약 기표(언어)와 기의(표현대상) 사이에 이런 약속이 없다면 언어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결코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언어 성립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그냥 지나쳐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말은 단순한 바람소리가 아니다. 말에는 무언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만약에 특별히 정해진 의미가 없다면 말은 그저 바람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말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걸까? 사람들의 말은 어린 새의 지저귐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우리들 몸 안에서 내뿜어지는 바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말 사이에는 정녕 구분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사실 말은 우리들의 몸에서 나오는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바람을 만들어 내뿜으니까 입 모양과 혀 모양에 따라 ‘아·이·우·에·오’ 라는 서로 다른 소리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 의미가 보태지면 소리는 소리로 그치지 않고 말로 전환된다. 그런데 말의 의미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성을 항상 띠고 있다. 그래서 장자는 ‘나를 소(牛)라고 부르면 소라고 할 것이고, 나를 말(馬)이라고 부르면 말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외편 <천도>). 이처럼 말이란 사용하다보니 그 의미가 생겨난 것이지, 처음부터 의미가 고정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말이 지시하는 의미를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개새끼’라고 말하면 우리들은 즉각 화를 낸다. 그런데 ‘개새끼’를 ‘강아지’라고 해석하면 화를 내기는커녕 내가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걸까 하고 마냥 즐거워 할 것이다. 그러니 말에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으면 시비판단이란 생겨날 수 없다. 즉 우리들이 말에 어떤 특정한 의미를 고정시키기에 시비이해가 생겨난다. 그래서 장자가 말하는 ‘말은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겨나는가?’에서 ‘무엇에 가리어져’가 뜻하는 바가 언어성립 요건과 직결되는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도(道)도 무엇인가에 가리어져 진위가 생겨난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저마다 서로 뽐내면서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은 표현된 언어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 사이의 관계를 절대불변으로 고정화시키기에 가능할 수 있다. 마치 고속도로와 같이 직선으로 쭉 뻗은 길이 바로 이런 길(道)이 아닌가. 고속도로란 이곳에서 저곳으로 빨리 가는 목적 하에 만들어지므로 설계자의 기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설계자는 이 목적에 충실하면서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는데 이런 작업이 언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를 고정화시키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산을 오를 때 자주 경험하는 것처럼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길은 누군가의 기획에 따라 의도해서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다 보니까 저절로 만들어진 길이다. 게다가 그 길은 처음에는 오솔길이었다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서 큰길로 저절로 바뀌기 마련이다. 여기서 정신적인 도(道)와 물리적인 도(道), 즉 우리들이 걸어 다니는 길의 결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점이 관념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서양사상과 현상에서부터 관념을 만들어내는 동양사상의 근본적 차이이다. 마찬가지로 장자가 그리는 언어관도 이런 것이다. 언어란 사람들이 말하다 보니까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의미가 고정되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道)는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은 무슨 뜻으로든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도는 조그마한 이룸(소성小成)에 가리어지고, 말은 확신에 찬 화려한 언변(영화榮華)에 숨어들기 마련이다. 이 점은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의 시비에서도 잘 드러난다. 큰 입장에서 보면 유가의 주장이나 묵가의 주장이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간 논쟁을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유가에선 그르다고 한 것을 묵가에서는 옳다고 하고, 또 유가가 옳다고 한 것을 묵가가 그르다고 해왔다. 그러나 상대가 그르다고 한 것을 옳다고 하고, 옳다고 한 것을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까? 장자는 이에 대해 시비이해를 초월한 밝은 지혜(明智)를 써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명지의 핵심이 우리들이 매일 사용하는 언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직결되어 있다. 언어와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 사이의 관계를 고정화 시키지 않고서 보다 유연하게 연결지으면 그것이 바로 명지의 입장에 서는 일이다. 즉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보다는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불가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도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 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원광지 2012년 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