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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도(道)를 터득한 사람의 큰 뜻을 누가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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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효신 조회 1,765회 작성일 2011-02-06 18:39본문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이 있다. 동양은 도(道)이고, 서양은 기(器)라는 말인데 이는 동양은 도학(道學)이 강하고, 서양은 기학(器學)이 강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도학은 형이상학과 같은 원리의 학문이라면 기학은 그로부터 응용되어 나온 형이하학, 즉 과학을 뜻한다. 이 말은 19세기 중반 서양 문물이 동양을 지배했던 서세동점(西勢東占)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이 고뇌 끝에 만들어낸 개념이다. 중국이 서구에 의해 유린되는 것은 응용학문인 과학을 소홀히 한 탓이지 근본학문인 도학을 소홀히 한 결과가 아니라는 항변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런데 동도서기에서 ‘그릇’ 기(器)로 표현한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틀’ 기(機)를 써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릇 기를 사용한 것은 탁월한 은유에 해당한다.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생활에 가장 요긴하면서 기술적으로 부가가치가 가장 높았던 물건이 도자기이다. 만약 도자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들의 식생활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보면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동시에 도자기를 만드는데 요구되는 기술은 고도의 장인 정신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도자기는 지금의 반도체쯤에 해당하는 고부가가치의 생활필수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도자기를 만들려면 모양을 잘 다듬고, 그것을 잘 구워야 한다. 그렇지만 좋은 흙을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할 수 없다. 좋은 흙을 선택해야만 모양도 잘 다듬어지고, 가마에서 잘 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흙을 선택하는 것은 도학의 영역이고, 모양을 잘 만들고, 잘 굽는 것은 기학의 영역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동양은 좋은 흙을 선택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서양은 모양을 잘 다듬고, 잘 굽는 것에 신경을 더 써 왔다. 이처럼 동양은 근본에 충실했다면 서양은 응용에다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기에 동도서기라는 말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도학에 대한 동양인의 관심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사유방식 그 자체가 도학 지향적이다. 그래서 유가와 도가 텍스트는 도의 원리에서부터 인간이 가야 하는 길(人道), 또 사회나 국가가 나아가야 하는 길(治道)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인간·기업·사회·국가를 다스리는 원리들은 심리학, 경영학, 사회학, 정치학과 같은 소위 ‘과학’으로 설명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 위에 군림하고 있는 보다 큰 원리, 즉 도(道)의 원리에 의해 보다 깊고, 넓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장자>가 바로 인도와 치도의 길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텍스트이다.
소위 훌륭하다는 인물도 그 분야에 ‘기(器)’가 아니라 ‘도(道)’를 터득해야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들의 마음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즉 마음공부를 향한 우리들의 서원도 도학에 입각해야만 평생 그 방법을 바꾸지 않고서 오롯한 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기학에 바탕 한다면 마음공부의 심지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선 자신의 마음공부 방법에 대해 쉽게 회의할 수가 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심경>과 <성경>이 훌륭한 텍스트라고 평가되는 것이고, 석가모니불과 예수님도 아름답게 보여 지는 것이다. 자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장자>의 첫 글인 소요유의 대붕의 비상(飛上)을 한 번 감상해 보자.
북명(北冥)에 곤(鯤)이란 물고기가 있었는데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매우 크다.
그것이 변해 붕(鵬)이란 새가 되는데 그 크기 또한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매우 크다.
이 새가 힘껏 날아오르면 새의 날개는 마치 하늘에 걸린 구름과도 같다.
바다 기운이 움직여 큰 바람이 일면 새는 남명(南冥)으로 날아가는데 그 곳이 하늘의 호수(天池)이다.
괴이한 일을 잘 아는 제해(齊諧)가 말하길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 날개 짓을 하면
바다물이 튀길 3천 리,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르길 9만 리, 그리고 6개월을 날고서야 쉰다고 한다.”
그래서 달리는 말과 같고, 떠다니는 먼지와 같고, 천지간 생물이 내뿜어 생기는 바람과도 같다.
그런데 하늘이 새파란 것은 본래의 색깔일까, 멀어서 끝이 없어서일까?
이 때 대붕이 돌연 깨닫는다. 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올려다 볼 때처럼 똑같이 새파랗구나!
가령 물이 깊게 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만한 여력이 없다.
한 잔 물을 마루 패인 곳에 엎지르면 작은 풀잎은 떠서 배가 될 수 있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마루 바닥에 닿는다. 이는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를 띄울만한 여력이 없다.
그러므로 날개 밑에 충분한 바람이 쌓여야만 9만 리까지 높이 나를 수 있다.
그런 뒤에야 대붕은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진 채 막힘없이 훨훨 날아 남쪽으로 날 수 있다.
그런데 매미와 작은 새가 대붕을 비웃으면서 말한다.
“우리는 기껏해야 박달나무 가지에 오를 뿐이고, 때론 거기에도 못 미쳐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데
어떻게 9만 리나 높이 날아올라서 남쪽을 향해 날아갈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근교로 나갈 때는 세 끼를 다 먹지 않아도 황혼녘에 돌아올 때까지 배가 고프지 않다.
백 리 밖으로 멀리 나갈 때는 하룻밤 걸려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 밖으로 나갈 때는 석 달 치 양식을 준비해야 하니 얼마나 고달플 수 있을까!
그래서 장자가 말했다. “작은 벌레나 작은 새가 어찌 붕(鵬)의 비상을 알겠는가!”
매미와 작은 새는 대붕의 이런 깊은 뜻을 도저히 알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조금 아는 사람(小知)’이 ‘많이 아는 사람(大知)’의 깊은 내면을 헤아릴 수가 없으며, ‘짧은 삶(小年)’으로 ‘긴 삶(大年)’을 헤아릴 수도 없다. 즉 식견이 얕으면 지식이 깊고 풍부한 자의 시야를 볼 수 없으며, 수명이 짧은 사람은 유구한 일들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아침에 생겨나 저녁에 죽는 버섯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또 한 여름에만 활동하는 매미도 봄과 가을을 알 수가 없다고.” 이는 수명이 짧은 탓이다. 그런데 바로 우리들이 이런 매미나 하루살이 버섯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를 터득한 사람의 입장에선 이런 소지(小知)와 소년(小年)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얼마나 힘이 들까?
장자는 소요유 편에서 도를 터득한 사람으로서 열자(列子)를 들고 있다. 열자는 바람을 부리며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다가 보름쯤 지난 뒤에나 돌아오는 그런 사람인데 ‘복을 바라는 일(致福)’ 따위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그도 걸어 다니는 수고는 면했지만 여전히 바람에다 의존한다. 즉 그의 소요(逍遙)는 자연스런 바람에는 의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의 소요란 부귀, 명예, 애정과 같은 세속적인 것에다 의존하고 있다. 부귀를 얻어야 만족하고, 명예를 얻어야 기뻐하고, 애정을 얻어야 즐거워한다. 그런데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육기(六氣: 陰·陽·風·雨·晦·明, 역자주: 자연을 의미)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궁의 세계에 노니는 열자처럼 변화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이런 세속적인 것에 과연 의존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지인(至人)에겐 ‘자아’가 없으며(無己), 신인(神人)에겐 ‘의식적 행동’이 없으며(無功), 성인(聖人)에겐 ‘신분상 명칭’이 없다(無名)고.” 그렇다면 무기(無己)·무공(無功)·무명(無名)의 삶이란 나를 비울 때, 즉 아상(我相)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 아닌가. 이것이 장자에게 있어서 도를 터득한 사람의 모습인데 열자처럼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을 때 얻어질 수가 있다.
그런데 동도서기에서 ‘그릇’ 기(器)로 표현한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틀’ 기(機)를 써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릇 기를 사용한 것은 탁월한 은유에 해당한다.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생활에 가장 요긴하면서 기술적으로 부가가치가 가장 높았던 물건이 도자기이다. 만약 도자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들의 식생활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보면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동시에 도자기를 만드는데 요구되는 기술은 고도의 장인 정신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도자기는 지금의 반도체쯤에 해당하는 고부가가치의 생활필수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도자기를 만들려면 모양을 잘 다듬고, 그것을 잘 구워야 한다. 그렇지만 좋은 흙을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할 수 없다. 좋은 흙을 선택해야만 모양도 잘 다듬어지고, 가마에서 잘 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흙을 선택하는 것은 도학의 영역이고, 모양을 잘 만들고, 잘 굽는 것은 기학의 영역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동양은 좋은 흙을 선택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서양은 모양을 잘 다듬고, 잘 굽는 것에 신경을 더 써 왔다. 이처럼 동양은 근본에 충실했다면 서양은 응용에다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기에 동도서기라는 말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도학에 대한 동양인의 관심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사유방식 그 자체가 도학 지향적이다. 그래서 유가와 도가 텍스트는 도의 원리에서부터 인간이 가야 하는 길(人道), 또 사회나 국가가 나아가야 하는 길(治道)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인간·기업·사회·국가를 다스리는 원리들은 심리학, 경영학, 사회학, 정치학과 같은 소위 ‘과학’으로 설명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 위에 군림하고 있는 보다 큰 원리, 즉 도(道)의 원리에 의해 보다 깊고, 넓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장자>가 바로 인도와 치도의 길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텍스트이다.
소위 훌륭하다는 인물도 그 분야에 ‘기(器)’가 아니라 ‘도(道)’를 터득해야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들의 마음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즉 마음공부를 향한 우리들의 서원도 도학에 입각해야만 평생 그 방법을 바꾸지 않고서 오롯한 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기학에 바탕 한다면 마음공부의 심지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선 자신의 마음공부 방법에 대해 쉽게 회의할 수가 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심경>과 <성경>이 훌륭한 텍스트라고 평가되는 것이고, 석가모니불과 예수님도 아름답게 보여 지는 것이다. 자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장자>의 첫 글인 소요유의 대붕의 비상(飛上)을 한 번 감상해 보자.
북명(北冥)에 곤(鯤)이란 물고기가 있었는데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매우 크다.
그것이 변해 붕(鵬)이란 새가 되는데 그 크기 또한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매우 크다.
이 새가 힘껏 날아오르면 새의 날개는 마치 하늘에 걸린 구름과도 같다.
바다 기운이 움직여 큰 바람이 일면 새는 남명(南冥)으로 날아가는데 그 곳이 하늘의 호수(天池)이다.
괴이한 일을 잘 아는 제해(齊諧)가 말하길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 날개 짓을 하면
바다물이 튀길 3천 리,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르길 9만 리, 그리고 6개월을 날고서야 쉰다고 한다.”
그래서 달리는 말과 같고, 떠다니는 먼지와 같고, 천지간 생물이 내뿜어 생기는 바람과도 같다.
그런데 하늘이 새파란 것은 본래의 색깔일까, 멀어서 끝이 없어서일까?
이 때 대붕이 돌연 깨닫는다. 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올려다 볼 때처럼 똑같이 새파랗구나!
가령 물이 깊게 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만한 여력이 없다.
한 잔 물을 마루 패인 곳에 엎지르면 작은 풀잎은 떠서 배가 될 수 있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마루 바닥에 닿는다. 이는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를 띄울만한 여력이 없다.
그러므로 날개 밑에 충분한 바람이 쌓여야만 9만 리까지 높이 나를 수 있다.
그런 뒤에야 대붕은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진 채 막힘없이 훨훨 날아 남쪽으로 날 수 있다.
그런데 매미와 작은 새가 대붕을 비웃으면서 말한다.
“우리는 기껏해야 박달나무 가지에 오를 뿐이고, 때론 거기에도 못 미쳐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데
어떻게 9만 리나 높이 날아올라서 남쪽을 향해 날아갈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근교로 나갈 때는 세 끼를 다 먹지 않아도 황혼녘에 돌아올 때까지 배가 고프지 않다.
백 리 밖으로 멀리 나갈 때는 하룻밤 걸려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 밖으로 나갈 때는 석 달 치 양식을 준비해야 하니 얼마나 고달플 수 있을까!
그래서 장자가 말했다. “작은 벌레나 작은 새가 어찌 붕(鵬)의 비상을 알겠는가!”
매미와 작은 새는 대붕의 이런 깊은 뜻을 도저히 알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조금 아는 사람(小知)’이 ‘많이 아는 사람(大知)’의 깊은 내면을 헤아릴 수가 없으며, ‘짧은 삶(小年)’으로 ‘긴 삶(大年)’을 헤아릴 수도 없다. 즉 식견이 얕으면 지식이 깊고 풍부한 자의 시야를 볼 수 없으며, 수명이 짧은 사람은 유구한 일들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아침에 생겨나 저녁에 죽는 버섯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또 한 여름에만 활동하는 매미도 봄과 가을을 알 수가 없다고.” 이는 수명이 짧은 탓이다. 그런데 바로 우리들이 이런 매미나 하루살이 버섯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를 터득한 사람의 입장에선 이런 소지(小知)와 소년(小年)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얼마나 힘이 들까?
장자는 소요유 편에서 도를 터득한 사람으로서 열자(列子)를 들고 있다. 열자는 바람을 부리며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다가 보름쯤 지난 뒤에나 돌아오는 그런 사람인데 ‘복을 바라는 일(致福)’ 따위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그도 걸어 다니는 수고는 면했지만 여전히 바람에다 의존한다. 즉 그의 소요(逍遙)는 자연스런 바람에는 의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의 소요란 부귀, 명예, 애정과 같은 세속적인 것에다 의존하고 있다. 부귀를 얻어야 만족하고, 명예를 얻어야 기뻐하고, 애정을 얻어야 즐거워한다. 그런데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육기(六氣: 陰·陽·風·雨·晦·明, 역자주: 자연을 의미)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궁의 세계에 노니는 열자처럼 변화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이런 세속적인 것에 과연 의존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지인(至人)에겐 ‘자아’가 없으며(無己), 신인(神人)에겐 ‘의식적 행동’이 없으며(無功), 성인(聖人)에겐 ‘신분상 명칭’이 없다(無名)고.” 그렇다면 무기(無己)·무공(無功)·무명(無名)의 삶이란 나를 비울 때, 즉 아상(我相)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 아닌가. 이것이 장자에게 있어서 도를 터득한 사람의 모습인데 열자처럼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을 때 얻어질 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