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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익산에 총부가 있었던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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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진 조회 1,717회 작성일 2011-01-07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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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도라면 마땅히 의문을 가질만한 사항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으뜸가는 사항은 대종사님께서 많은 장소를 놔두시고 왜 익산에다 총부를 세우셨을까 하는 점이 아닐까. 출생지이자 또 진리를 밝히신 영광 성지도 있을 것이고, 또 이왕 옮길 바에야 아예 서울로 할 수도 있었을 텐 데.
그런데 ‘신라탑에 백제금강경이 봉안된 까닭은’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9월 23일자 KBS 역사스페셜은 이에 대해 어렴풋하지만 나름대로의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고 본다. 이 프로그램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소재한 5층 석탑에 안치된 금제금강경(국보 123호)에 관한 이야기로서 0.15밀리미터의 얇은 두께에 새겨진 19장으로 구성된 순금 경판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해 가면서 익산이 백제 무왕 시대 수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금제금강경은 1965년 왕궁리 석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 석탑 1층 금제사리내함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순제 경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 경판의 발견은 우리네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은 익산이 백제 수도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움직일 수 없는 사료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발견은 금제금강경이 발굴된 지 무려 40년만의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소장 김삼룡 교수)의 공적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교도들의 자긍심을 한층 드높이는 일이라고 본다.
그 동안 왕궁리 5층 석탑은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백제 시대 유물인 금제 금강경이 어떻게 이곳에 안치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학계는 큰 호기심을 갖고서 접근해 왔다. 그런데 왕궁리 성터를 복원하던 중 1993년 이 석탑 밑에 거대한 규모의 목탑지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백제 때 것으로 추정되었다. 왜냐하면 왕궁리 석탑에서 약 4.5킬로미터 떨어진 익산 미륵사지의 목탑지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목탑 위에 다시 석탑을 지은 셈인데 아마도 백제 목탑이 붕괴되자 통일신라시대 때 그 위에 석탑을 새로 지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사실만 갖고서는 대종사님이 왜 익산에다 총부를 정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관세음응험기에 따르면 금제금강경은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원래는 왕궁리 석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왕궁리로부터 약 1킬로 떨어진 제석사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기 639년 제석사가 화재로 소실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된 주춧돌에는 금제금강경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무왕은 화재로 소실되지 않은 금제금강경을 다시 보관하기 위해 자신의 왕궁에 목탑을 짓고 여기에 안치했던 것이다.
오늘날 발굴조사를 통해서 왕궁리에는 남북으로 490미터, 동서로 240미터 길이의 왕궁이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물론 무왕 이전의 백제 수도는 부여였는데 무왕이 익산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나제동맹을 깬 신라를 응징하고, 나아가 한강 유역의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결과 익산에서 가장 가까운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에서 두 나라 사이에 가장 많은 전투가 있었다. 게다가 무왕은 부인의 꿈을 해몽해서 익산에 미륵사까지 세웠다. 그만큼 익산은 무왕의 승부처였던 셈이다.
그러나 무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의자왕은 수도를 다시 부여로 옮겼다. 이는 무왕의 익산세력을 누르고, 자신을 떠받쳐준 사비세력과 연합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보아진다. 그렇지만 해동성자라고 불리는 의자왕은 지극한 효자였기에 익산 왕궁성터를 허물거나 방치하지 않고, 이곳에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왕궁사를 지었다. 백제의 다른 왕들과 달리 무왕은 부여에 자신의 시신을 묻지 않고, 익산에 묻혔다.
그렇다면 무왕이 익산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고, 금제금강경을 왕궁의 가장 중요한 곳에 봉안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익산이 무왕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승부처였으며, 그 승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금제금강경을 소중하게 안치시킴으로서 불력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이 아닌듯 싶다. 그만큼 익산과 불력은 공통분모로서 엮여질 수 있는 대목인데 대종사님께서도 이런 사실들을 감안하고 익산에 총부를 정한 것이 아닐까?
더욱이 무왕 부인의 꿈에 따라 세워진 미륵사도 익산 총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사실 미륵불은 석가여래불 다음에 오실 새 부처님이다. 그렇다면 무왕과 금제금강경, 미륵사, 그리고 익산 성지 등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혹시 대종사님이 새 부처님 미륵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의 결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