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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만물은 저것 아닌 게 없고, 만물은 옳음 아닌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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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2,139회 작성일 2013-08-12 13:36본문
제목: 만물은 저것 아닌 게 없고, 만물은 옳음 아닌 게 없다
만물은 저것 아닌 게 없고,
만물은 옳음 아닌 게 없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원문)
세상 만물은 저것(彼) 아닌 게 없다. 또 세상 만물은 옳음(是) 아닌 게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저것으로 규정하면 스스로를 못 보고, 옳음이라 규정해야만 자신을 안다.
옛 사람은 저것은 옳음에서 생겨나고, 옳음은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저것과 옳음이 함께 짝을 짓는다는 주장(彼是方生之說)’이다.
그런데 한 쪽에서 태어남은 다른 쪽에서 죽음이고, 한쪽에서 죽음은 다른 쪽에서 태어남이다.
또 한쪽에서 가함은 다른 쪽에서 불가함이고, 한쪽에서 불가함은 다른 쪽에서 가함이다.
또 ‘그러니까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다(因是因非).’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因非因是).’
그래서 성인은 특별한 이유 없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세상사를 조망한다.
이것 역시 ‘그러니까 그러함(因是)’에 따라 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옳음(是) 역시 저것(彼)이고, 저것(彼) 역시 옳음(是)이다.
또 저것(彼)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고, 이것(此)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다.
(원문)
그렇다면 저것(彼)과 옳음(是)의 짝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인가, 없었던 것인가?
저것과 옳음을 한 짝으로 여기지 않으면 이것을 ‘도추(道樞)’라고 말한다.
물레의 추(樞)는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무궁한 변화에 한없이 대처한다.
옳음(是)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고, 그름(非)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밝음(明)을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
故曰莫若以明.
<장자>내편 중에서 ‘제물론’ 해석은 가장 까다롭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장자서들을 보면 ‘제물론’에서 그 해석과 번역들이 서로 엇갈려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장자사상의 접근을 방해하는 큰
요인이기도 하다. 특히 ‘제물론’ 중에서도 지금 다룰 부분은 해석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런 탓인지 장자서마다 그 번역과 해석들이 많이 다르다. 심지어 같은 구절에 대해서 반대의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실은 국내 저자들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저명한 장자 전공자, 번역서나 해설서의 경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전에 글의 재미가 반감되더라도 번역을 꼼꼼히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꼼꼼한 번역을 위해 이 글 주제가 무엇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 장자 전공자들은 대부분 이 글 주제를 ‘도(道)의 상대성’으로 주장한다.
그래서 이 글의 시작부인 물무비피 물무비시(物無非彼 物無非是)를
‘사물이 저것(彼) 아닌 것이 없고, 사물이 이것(是) 아닌 것이 없다.’는
식으로 번역한다. 이는 사물은 이것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식 해석은 개념적으로 큰 문제를 수반한다. ‘피(彼)’를 ‘저것’으로 번역한 것은 맞지만 ‘시(是)’를 ‘이것’으로 번역한 데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번역하려면 ‘시(是)’ 대신 저것/이것을 뜻하는 피차(彼此)에서의 ‘차(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장자는 ‘저것’을 지시하기 위해 의미가
제대로 연결이 안 되는 ‘시(是)’란 글자를 무리하게 선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안동림 선생의 장자 해설서(현암사 간)를 보면
‘시(是)’를 ‘차(此)’로 간주해서 해석한다는 짤막한 말만 남기고 있다. 말이 안 되는 설명이지만 이런 설명을 수용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 글 말미를 보면 장자는 “옳음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고, 그름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다(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옳음(是)’과 ‘그름(非)’을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장자가 ‘시(是)’를 저것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결정적 증거에 해당한다.
어디 그 뿐인가? 이 글 중간쯤에서도 “저것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고, 이것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다(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라고 언급하면서 ‘저것(彼)’과 ‘이것(此)’을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역시 장자가 ‘이것’을 지시하기 위해 ‘시(是)’라는 단어 대신 일반적으로 ‘이것’을 지시하는 ‘차(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이다.
그렇다면 ‘시(是)’를 ‘차(此)’로 간주해서 해석한다는 대다수 국내외 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글의 문법은 제쳐두고라도 이렇게 개념상으로도 도의 상대성이 이 글의 주제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글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한 축을 담당했던 명가(名家) 견백론(見白論)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견백론은 당시 대표적 소피스트인 공손룡(公孫龍)의 주장으로, 그는 ‘백마는 말이 아니다.’는 주장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견백론은 흰 말은 ‘흰 말’이지 막연히 ‘말’이라는 추상적 개념만으로
지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사물과 이를 지시하는 언어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전통적 서양기호학이 강조하는 ‘기의(대상)=기표(언어)’와 마찬가지 입장이다. 따라서 말의 색이 희면 반드시 흰 말이라고 지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흰색과 얼룩이 있는 말이면 흰 얼룩말로 지시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소피스트들은 정확하고 객관적인 언어 사용을 강조했다. 그래야만 이들의 ‘궤변’도 가능할 수 있다. 물론 현대판 소피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법률가도 사물과 이를 지시하는 언어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같은 범죄행위에 대해 적용하는 형법이 다르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범죄행위와 이를 지시하는 언어인 형법 간에 의미의 일치가 결여되면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형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형법 1조를 적용하면 징역 10년형인데, 형법 2조를 적용하면 징역 1년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명가(名家)는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보완책으로 생겨난 사상이다. 그런데 객관적이고 정확한 언어사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우리들의 마음은 ‘빈 마음(虛心 또는 空心)’과 더욱 멀어진다. 명가의 주장인 “저것(彼)과 옳음(是)이 함께 짝을 짓는다는 설(彼是方生之說)”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언뜻 보아선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음작용이 저것(彼)과 옳음(是)의
짝짓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은 이미 우리들의 의식을 점거한지 오래되었다. ‘착한’ 철수, ‘나쁜’ 영희, ‘좋은’ 미국, 나쁜’ 일본, ‘있는’ 판단, ‘없는’ 생각 등으로 ‘저것(彼)’인 철수, 영희, 미국, 일본, 판단, 생각 등에 대해 선악(善惡), 시비(是非), 유무(有無) 등으로 채색화 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문제는 이런 익숙함에 점점 길들여지면 우리들의 마음과 의식이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것은 옳음에서 생겨나고, 옳음은 저것에서 비롯된다(彼出於是 是亦因彼).”는 게 실제로 증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라는 ‘저것’은 좋음에서 생겨나고, 좋음은 미국에서 비롯되지 않은가? 이처럼 ‘저것(彼)’과 ‘옳음(是)’이, 또 ‘이것(此)’과 ‘그름(非)’이 서로 만나서 상승작용을 할수록 우리들의 마음에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더욱 깊이 심어진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고착된 마음(成心) 상태이다. 고착된 마음으로는 장자가 그리는 소요유(逍遙遊) 상태에 도저히 이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장자는 이 고착된 마음을 극히 꺼려해서 이 개념을 <장자> 곳곳에 등장시키고 있지 않은가?
| 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원광지 2012년 02월호]
만물은 저것 아닌 게 없고,
만물은 옳음 아닌 게 없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원문)
세상 만물은 저것(彼) 아닌 게 없다. 또 세상 만물은 옳음(是) 아닌 게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저것으로 규정하면 스스로를 못 보고, 옳음이라 규정해야만 자신을 안다.
옛 사람은 저것은 옳음에서 생겨나고, 옳음은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저것과 옳음이 함께 짝을 짓는다는 주장(彼是方生之說)’이다.
그런데 한 쪽에서 태어남은 다른 쪽에서 죽음이고, 한쪽에서 죽음은 다른 쪽에서 태어남이다.
또 한쪽에서 가함은 다른 쪽에서 불가함이고, 한쪽에서 불가함은 다른 쪽에서 가함이다.
또 ‘그러니까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다(因是因非).’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因非因是).’
그래서 성인은 특별한 이유 없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세상사를 조망한다.
이것 역시 ‘그러니까 그러함(因是)’에 따라 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옳음(是) 역시 저것(彼)이고, 저것(彼) 역시 옳음(是)이다.
또 저것(彼)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고, 이것(此)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다.
(원문)
그렇다면 저것(彼)과 옳음(是)의 짝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인가, 없었던 것인가?
저것과 옳음을 한 짝으로 여기지 않으면 이것을 ‘도추(道樞)’라고 말한다.
물레의 추(樞)는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무궁한 변화에 한없이 대처한다.
옳음(是)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고, 그름(非)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밝음(明)을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
故曰莫若以明.
<장자>내편 중에서 ‘제물론’ 해석은 가장 까다롭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장자서들을 보면 ‘제물론’에서 그 해석과 번역들이 서로 엇갈려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장자사상의 접근을 방해하는 큰
요인이기도 하다. 특히 ‘제물론’ 중에서도 지금 다룰 부분은 해석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런 탓인지 장자서마다 그 번역과 해석들이 많이 다르다. 심지어 같은 구절에 대해서 반대의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실은 국내 저자들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저명한 장자 전공자, 번역서나 해설서의 경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전에 글의 재미가 반감되더라도 번역을 꼼꼼히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꼼꼼한 번역을 위해 이 글 주제가 무엇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 장자 전공자들은 대부분 이 글 주제를 ‘도(道)의 상대성’으로 주장한다.
그래서 이 글의 시작부인 물무비피 물무비시(物無非彼 物無非是)를
‘사물이 저것(彼) 아닌 것이 없고, 사물이 이것(是) 아닌 것이 없다.’는
식으로 번역한다. 이는 사물은 이것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식 해석은 개념적으로 큰 문제를 수반한다. ‘피(彼)’를 ‘저것’으로 번역한 것은 맞지만 ‘시(是)’를 ‘이것’으로 번역한 데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번역하려면 ‘시(是)’ 대신 저것/이것을 뜻하는 피차(彼此)에서의 ‘차(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장자는 ‘저것’을 지시하기 위해 의미가
제대로 연결이 안 되는 ‘시(是)’란 글자를 무리하게 선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안동림 선생의 장자 해설서(현암사 간)를 보면
‘시(是)’를 ‘차(此)’로 간주해서 해석한다는 짤막한 말만 남기고 있다. 말이 안 되는 설명이지만 이런 설명을 수용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 글 말미를 보면 장자는 “옳음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고, 그름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다(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옳음(是)’과 ‘그름(非)’을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장자가 ‘시(是)’를 저것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결정적 증거에 해당한다.
어디 그 뿐인가? 이 글 중간쯤에서도 “저것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고, 이것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다(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라고 언급하면서 ‘저것(彼)’과 ‘이것(此)’을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역시 장자가 ‘이것’을 지시하기 위해 ‘시(是)’라는 단어 대신 일반적으로 ‘이것’을 지시하는 ‘차(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이다.
그렇다면 ‘시(是)’를 ‘차(此)’로 간주해서 해석한다는 대다수 국내외 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글의 문법은 제쳐두고라도 이렇게 개념상으로도 도의 상대성이 이 글의 주제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글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한 축을 담당했던 명가(名家) 견백론(見白論)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견백론은 당시 대표적 소피스트인 공손룡(公孫龍)의 주장으로, 그는 ‘백마는 말이 아니다.’는 주장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견백론은 흰 말은 ‘흰 말’이지 막연히 ‘말’이라는 추상적 개념만으로
지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사물과 이를 지시하는 언어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전통적 서양기호학이 강조하는 ‘기의(대상)=기표(언어)’와 마찬가지 입장이다. 따라서 말의 색이 희면 반드시 흰 말이라고 지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흰색과 얼룩이 있는 말이면 흰 얼룩말로 지시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소피스트들은 정확하고 객관적인 언어 사용을 강조했다. 그래야만 이들의 ‘궤변’도 가능할 수 있다. 물론 현대판 소피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법률가도 사물과 이를 지시하는 언어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같은 범죄행위에 대해 적용하는 형법이 다르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범죄행위와 이를 지시하는 언어인 형법 간에 의미의 일치가 결여되면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형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형법 1조를 적용하면 징역 10년형인데, 형법 2조를 적용하면 징역 1년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명가(名家)는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보완책으로 생겨난 사상이다. 그런데 객관적이고 정확한 언어사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우리들의 마음은 ‘빈 마음(虛心 또는 空心)’과 더욱 멀어진다. 명가의 주장인 “저것(彼)과 옳음(是)이 함께 짝을 짓는다는 설(彼是方生之說)”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언뜻 보아선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음작용이 저것(彼)과 옳음(是)의
짝짓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은 이미 우리들의 의식을 점거한지 오래되었다. ‘착한’ 철수, ‘나쁜’ 영희, ‘좋은’ 미국, 나쁜’ 일본, ‘있는’ 판단, ‘없는’ 생각 등으로 ‘저것(彼)’인 철수, 영희, 미국, 일본, 판단, 생각 등에 대해 선악(善惡), 시비(是非), 유무(有無) 등으로 채색화 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문제는 이런 익숙함에 점점 길들여지면 우리들의 마음과 의식이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것은 옳음에서 생겨나고, 옳음은 저것에서 비롯된다(彼出於是 是亦因彼).”는 게 실제로 증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라는 ‘저것’은 좋음에서 생겨나고, 좋음은 미국에서 비롯되지 않은가? 이처럼 ‘저것(彼)’과 ‘옳음(是)’이, 또 ‘이것(此)’과 ‘그름(非)’이 서로 만나서 상승작용을 할수록 우리들의 마음에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더욱 깊이 심어진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고착된 마음(成心) 상태이다. 고착된 마음으로는 장자가 그리는 소요유(逍遙遊) 상태에 도저히 이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장자는 이 고착된 마음을 극히 꺼려해서 이 개념을 <장자> 곳곳에 등장시키고 있지 않은가?
| 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원광지 2012년 0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