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참여마당

Home m_note

CS Center

tel. 080-910-0600

am 9:00 ~ pm 6:00

토,일,공휴일은 휴무입니다.

02-916-6191
sales2@i-sens.com

공부참여마당

::: 로그인후 글쓰기 버튼이 나타납니다. 이용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소요유 - 과학보다는 도학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효신 조회 1,691회 작성일 2011-12-04 19:54

본문

소요(逍遙)의 가능성 - 과학이 아니라 도학에서



오늘날 실용학문이 득세하고 있다. 물리학보다는 전자공학이, 화학보다는 약학이, 경제학보다는 경영학이, 정치학보다는 행정학이 젊은이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다. 게다가 대학의 존재 이유이자, 아니 그 자체였던 문학, 사학, 철학은 이미 뒷전에 처박힌 지 오래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대학에서는 문사철(文史哲)로 대표되는 칼리지(college) 지식은 죽고, 직업교육에 해당하는 스쿨(school) 지식만이 득세하고 있다. 경영대학(business school), 공과대학(engineering school), 법과대학(law school), 의과대학(medical school) 등이 대학의 전면에 포진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애플컴퓨터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학비 때문에 중퇴했던 자신의 모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플라톤과 호머로부터 시작되어 카프카에 이르는 리드대학의 고전 독서프로그램이 오늘날 애플 컴퓨터를 만든 결정적 힘이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덧붙여 자신이 대학을 다닐 때 동양철학, 특히 불교에 심취했을 뿐 아니라 대학 시절에 익힌 서예 강좌에서 매킨토시 컴퓨터와 아이팟 디자인 감각을 배울 수 있었다고 실토했다. 이렇게 보면 칼리지 지식은 무용한 게 아니라 멀리, 또 크게 보면 정말로 유용한 지식으로 탈바꿈 한다. 한국의 대학교육에서 불교와 서예의 흔적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데 이게 무슨 아이러니일까?
그런데 2천여 년 전에 살았던 장자에게도 이런 문제점이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똑같이 다가온 듯하다. 세속의 사람들은 장자를 공허한 소리나 늘어놓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보았던 것이다. 요즘 말로 장자는 도학(道學)을 하고자 하는데 오늘날 과학에 해당하는 기학(器學, 오늘날의 과학을 의미)을 사람들이 선호한 탓이다. 이것이 속인(俗人)드링 유용지용(有用之用)의 과학을 선호하더라도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도학을 장자가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장자는 자신의 책을 시작하면서 “작은 벌레나 작은 새가 어찌 대붕의 비상을 알겠는가!(之二蟲又何知)” 라고 하면서 자신을 대붕에다 비유했던 것이다.
장자서 도입부인 소요유(逍遙遊)를 조금 더 관찰하면 과학이 아니라 도학을 하겠다는 장자의 결심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하늘이 파란 것은 본래 파란 것일까, 아니면 끝이 없어 파랗게 보이는 것일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래서 올려다 볼 때처럼 똑같이 파랗구나.

  하늘이 파란 것은 본래 파란 것일까, 끝이 없어 파랗게 보이는 것일까 중에서 장자가 선택한 것은 후자이다. 장자가 왜 그런 결론을 유도했을까? 그것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래서 올려다 볼 때처럼 똑같이 파랗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하늘이나 땅이나 멀리서 보면 똑같이 파랗게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구 바깥에서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정말로 지구가 파랗게 보이지 않는가? 여기서 파란 색 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다.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 강, 호수 숲 등의 구별이 모두 없어져 똑같이 보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단지 파란색을 동원했을 뿐이다. 이는 세상만물을 나누어(科) 볼 필요가 없다는 점과 긴밀히 연결된다. 즉 나누어 보면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멀리서보면 모두가 하나의 색으로 통일되어 구분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도학이 설 수 있는 존재이유이다.
그런데 장자가 도학의 가치를 더 극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있다. “대붕이 힘껏 날아오르면 대붕의 날개는 마치 하늘에 걸린 구름과도 같다(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는 표현이 그것이다. 대붕의 날개가 하늘에 걸린 구름과도 같았다면 대붕이 그만큼 높게 날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대붕의 그림자는 분명 바다에 크게 드리워졌을 것이다. 만약 대붕이 낮게 날았더라면 하늘에 걸린 구름처럼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그림자도 대붕의 실제 크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도학과 과학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과학은 세상의 원리를 분명하고 명료하게 설명할는지 모르지만 그 설명력이 제한적인데 반해 도학은 그 원리를 설명하는데 설령 분명하거나 명료하지 못하더라도 그  설명 범위는 모든 과학에 두루 걸쳐 있다. 이런 도학과 과학의 특징을 장자는 바다에 드리운 그림자로 설명했던 것이다.
우리들이 만약 과학이 아니라 도학을 하겠다는 주장을 펼칠 때 장자처럼 이렇게 멋들어지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장자의 뛰어난 문학성이 더욱 드러나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도학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장자는 소요유 편을 접으면서 자신의 도학이 결코 쓸모없는 학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 한다. 물론 이것도 대붕의 그림자 비유처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한 비유로서, 그리고 해학으로서 점잖게 표현한다. 물론 이런 표현이 보다 극적으로 살아나기 위해 혜시라는 조연을 동원하는데...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아주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가죽나무라고 부른다네.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목수가 먹줄을 튀길 수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 자(尺)를 댈 수가 없네.
그래서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어도 목수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네.
당신 말은 이 나무처럼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어 뭇사람들이 모두 외면하여 떠나지 않는가?”
그 말을 들은 장자가 대꾸했다...
“당신은 그 큰 나무를 갖고서 그것이 쓸모없다는 걱정만 하는데
어째서 그 나무를 무하유(無何有, 어째서 그런가의 이유가 없는)의 마을에 심거나 광활한 들판에 심어 놓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면서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소요함이 어떤가?
도끼에 일찍 베어질 염려도 없고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이니
쓸모없다는 것이 어찌 근심거리가 될 수 있겠는가?”

나무가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튀길 수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 자를 댈 수 가 없어 목수들이 거들떠보지 않아 이렇게 클 때까지 아무도 나무를 베어 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즉 목수의 눈에는 무용(無用)한 나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나무 옆에서 한가로이 쉬면서 유유히 소요할 수 있기에 결코 무용한 나무가 아니라 유용한 나무이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 무용지용의 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무용하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영어 실력을 쌓고, 실용학문을 익히고, 스펙도 쌓고 한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젊은이의 성실성과 정직성이 으뜸의 가치이다. 그 으뜸의 가치를 무용하다는 젊은이들을 보고 기성세대는 답답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젊은이들만의 가치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