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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큰 말(大言)과 작은 말(小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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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효신 조회 1,910회 작성일 2011-12-04 19:58

본문

큰 말은 힘이 있고(大言炎炎),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小言詹詹)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는 말로 유명해진 20세기 최고의 인문학자 매크루헌(M. McLuhan)은 오늘날 사회, 즉 근대사회(modern society)를 가리켜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 이름을 따서 ‘구텐베르크 은하계’라고 부른다. 이 말은 오늘날 사회를 만들어 낸 근저에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이 그 핵심에 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전 세계 석학들을 상대로 한 ‘지난 1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발명품이 무엇이냐’는 수차례에 걸친 구미 언론 조사에서도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모두 인쇄술이 선정되었다. 그만큼 구텐베르크가 만들어 낸 인쇄술이 근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천 년의 밀레니움(Millenium)이 아니라 그 기간을 인류의 전 역사로 확장하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일 것이다. 언어 발명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언어가 지닌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두뇌를 굴림으로써 지능의 발달을 가져와 동물과 전혀 다른 문명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언어와 문자, 그리고 활자는 우리들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발명품들이다. 게다가 0/1로 구성된 디지털 언어는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을 크게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언어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성립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문법이 필요하다. 문법이란 말의 사용설명서이다. 그렇지만 문법은 말이 지닌 의미를 통하기 위한 단순한 사용설명서에 불과하다. 그래서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의미 있는 사용설명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품위 있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한 사람의 인격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모습과 태도, 즉 ‘언격(言格)’에 의해 대부분 지배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품위 있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지 않은가. 그래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등의 멋있는 수사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장자도 이와 비슷한 방식의 접근을 택한다. ‘큰 말은 힘이 있고(大言炎炎),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小言詹詹)’가  그것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무리 구체적으로 언급해도 입만 힘들 뿐이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수사만큼이나 가슴에 와 닫지 않는다. 또 로마제국의 명장 카이사르의 용맹성을 아무리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해도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만큼이나 설득적이지 못하다. 바로 이것이 큰 말과 작은 말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큰 말은 왜 힘이 있다고 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대언염염(大言炎炎)에 있어서 염(炎)의 의미를 보다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염은 불 화(火)가 두 개 포개져 있는 글자이다. 불 화(火)가 두 개 있으니 그냥 불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그 불은 힘이 있어 보일 수밖에 없다. 큰 말은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힘이 있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수다스러운 말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말이기에 힘이 없을 수밖에 없다.
궤변론자들인 소피스트들의 말은 작은 말에 해당한다. 소피스트들은 상대의 허점을 틈타 시비를 따지기에 그들이 쏘아대는 말은 시위를 떠난 활과도 같다. 그만큼 직선적인 표현들이 많아 상대방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할 수 있다. 또 소피스트들의 말은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교묘한 논리와 미려사구(美麗辭句)를 동원하여 상대방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서 때로는 비수가 되어 상대방을 찌르는 무자비한 폭력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정치인들에 의해 오염된 언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요즈음 정치인의 언어는 ‘불통(不通)’을 넘어 거의 협박에 가까울 때가 많아서이다.
그래서 노자는 그의 『도덕경(道德經)』을 다음의 말로 마무리한다.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 선한 자는 말을 잘 못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善者不辨 辨者不善)”고.
아름다운 말이란 실제보다 부풀려서 표현하는 일종의 과잉기표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것은 의미를 가공하는 감미료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한 아름다운 말이란 감미료를 잔뜩 쏟아 부은 말쯤에 해당하지 않을까? 우리들이 음식 만들 때 감미료를 넣으면 음식은 분명 맛 있어진다. 이런 맛에 익숙해지면 감미료를 넣지 않으면 음식 맛을 잃고 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감미료를 계속 쏟아 넣어야 한다. 문제는 쏟아 넣는 감미료가 점점 많아지면서 결국 감미료에 중독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음식만 그러한 게 아니다. 말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이야기하다가도 자신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 하면 시시콜콜하게 모든 것을 전하거나 강한 형용사와 부사를 마구 동원하여 자신의 생각을 강조하려고 든다. 이 경우 감미료는 천연에서 인공으로 과감히 변신한다.   
‘병(病)은 입으로 들어가지만 화(禍)는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말을 위해 인공감미료를 듬뿍 뿌렸을 때 생겨나는 경우이다. 그렇지만 인공감미료가 들어간 말일수록 아름답지 못하고, 오히려 편파적이고 위험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언어를 가리켜 풍파에 비유하는데 사람들은 이런 언어를  즐기기에 결국 화를 내거나 다투는 수단으로 언어가 왕왕 귀결된다. 그래서 장자는 다음처럼 말한다. “말은 풍파와 같고, 행위는 득실을 따른다. 풍파는 쉽게 변화하고, 득실은 위험에 빠지기 쉽다. 고로 화가 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교활한 말과 편파적인 논리 때문이다.” 이처럼 남을 속이려는 사람들은 말에 인공감미료를 잔뜩 뿌려 상대방을 현혹시키려 든다. 담담한 맛의 말보다는 온갖 양념이 잔뜩 들어간 유혹적인 말을 자신들의 언어로 선택하고, 또 교묘한 논리를 설득의 도구로 동원하여 그럴듯하게 자신의 말을 포장한다.
현대의 대표적 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도 ‘말의 그림론’을 만년에 폐기하고 이와 상반된 ‘말의 쓰임론’을 주장한 바 있다. 그림론이란 언어가 실제를 대변한다는 생각에서 모든 의미를 언어로 채울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말이 자연 많아질 수밖에 없고, 결국 작은 말들의 구성이 되고 만다. 말의 쓰임론은 말이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전부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는 침묵으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말의 사용이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구약성서』「잠언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선각자들이 말에 대해 경고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들의 언어사용은 점점 큰 말에서 작은 말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