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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칼럼 [玄, 장자와 소통] 희로애락은 왜 생겨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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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효신 조회 2,067회 작성일 2011-12-04 19:59

본문

오른 쪽 뺨을 맞더라도 어떻게 해야 왼쪽 뺨을 내밀 수 있을까?


우리들은 기뻐하다가(喜) 노여워하고(怒), 슬퍼하다가(哀) 즐거워한다(樂). 이를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고 말한다. 어디 그 뿐인가? 머리를 굴려 세세하게 도모하다가(慮)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 새 한 숨을 쉬고(嘆),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變) 또 고집을 피우면서 쓸데없이 집착을 한다(慹). 장자는 이를 여탄변집(慮嘆變慹)이라고 표현한다.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빈 틈 없이 일을 처리하는가 하면(姚) 또 흐리터분하게 일을 처리하기고 한다(佚).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내보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때는 상대방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다가는(啓), 또 어떤 때는 무언가 꾸며서 상대방에게 접근하려고 든다(態). 장자는 이를 요일계태(姚佚啓態)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보아도 이런 감정들의 변화가 모두 생겨나지 않는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기뻐하지만 그 친구가 속이려 들면 금방 노여워하고, 또 누군가 만나면 즐거워하다가 그와 헤어지면 슬퍼한다. 그만큼 이런 감정들의 변화에 우리 모두는 익숙해 있다. 그래서 장자는 텅 빈 퉁소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에다 이를 비유한다. 입에서 나오는 바람이 텅 빈 퉁소에 들어가면 구멍의 열리고 닫힘에 따라 퉁소는 수 십 수백 가지의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소리의 만들어짐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습하면 버섯이 저절로 돋아나는 것에다 이를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일생 내내 희로애락의 퉁소소리, 여탄변집의 퉁소소리, 요일계태의 퉁소소리를 내뿜으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그런데 희로애락·여탄변집·요일계태의 감정들이 밤낮 없이 생겨나지만 이것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 누구도 모른다. 장자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존재를 ‘참된 주재자(진재眞宰)’라고 막연히 표현하고는 있지만 이런 감정들을 만들어 내는 참된 주재자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애써 알려 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아마도 애써 안다 하더라도 감정 변화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갖가지 감정을 만들어 내게 하는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감정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감정이 나타날 데가 없지 않은가. 즉 바람이 있으니까 통소소리가 나오고, 습하니까 버섯이 돋아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무언가가 이런 감정들을 만들어내지만 그 모습을 우리들은 볼 수가 없다. 갖가지 감정들이 생겨나는 작용은 분명하지만 그 형태를 볼 수 없는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감정 변화의 원인을 찾는 것에 대해서조차 눈감아선 안 된다고 장자는 말한다. 이것이 장자가 제물론(齊物論)을 시작하면서 사람의 퉁소소린인 인뢰(人籟)을 설명하기 위해 대지의 퉁소소리인 지뢰(地籟)를 동원한 이유이다.
대지에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이 나무에 부딪히는 순간 많은 소리를 만들어낸다. 대지의 바람이 나무 등걸에 부딪히면 ‘우~’ 하는 소리를, 또 나무줄기에 부딪히면 ‘쉬~’ 하는 소리를 제각각 낸다. 이 때 나무 등걸과 나무줄기는 희로애락·여탄변집·요일계태의 감정들을 만들어내는 각각의 원인자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친구와의 만남이 나무 등걸이라면 친구와의 헤어짐은 나무줄기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 나무 등걸에 부딪히면 기쁨(喜) 감정이 생겨나고, 나무줄기에 부딪히면 분노(怒)의 감정이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큰 나뭇가지에 부딪히면 슬픔(哀)의 감정이 생겨나고, 작은 나뭇가지에 부딪히면 즐거움(樂)의 감정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나무 잎사귀에 부딪히더라도 분노(怒)의 감정보다는 기쁨(喜)의 감정을 만들어내면, 또 큰 나뭇가지에 부딪히더라도 슬픔(哀)의 감정보다는 즐거움(樂)의 감정을 만들어내면 우리들은 희로애락이라는 질곡의 감정에서부터 상당히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분노의 감정과 슬픔의 감정을 우리들의 마음에서 아예 지워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주로 도덕 교육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일이 생겨도 그것을 억울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또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인격자라고. 그렇지만 이것은 결국 강요된 즐거움, 강요된 기쁨이 아닐까?
장자는 이런 강요된 즐거움과 강요된 기쁨을 배격하기 위해 대지의 바람이 부는 것 뿐 아니라 그 그침에 대해서 언급한다. 대지의 바람이 불 때는 수많은 소리가 만들어지지만 대지의 바람이 그칠 때는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만을 장자는 그려낸다. 살랑살랑 흔들이는 나무 잎사귀 상태가 바로 우리의 마음이 편안한 상태, 즉 평정심(平靜心)에 이른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우리들 몸 안에서 나오는 바람과 대지의 바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지의 바람은 멈추어 질 때가 있지만 우리들 몸 안에서 나오는 바람은 평생 멈추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쉴 새 없이 퉁소소리를 불어댄다. 그러니까 자연(대지)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지만 인간은 평정심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연과 같이 우리들을 평정심으로 이끌 수 있을까? 그것은 몸 안에서 나오는 바람을 멈추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어떻게 바람을 멈출 수 있을까? 그것은 몸 안에서 바람을 만들고, 또 멈추게 하는 유연한 존재로서 ‘참된 주재자’를 바꾸어 가야 한다. 어떻게 참된 존재자를 유연하게 바꾸어 갈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을 비워야만 가능한 일이다. 즉 공(空)의 상태로 우리들의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
자연의 퉁소소리인 천뢰(天籟)가 바로 공의 상태를 뜻한다. 자연의 퉁소소리는 대지의 퉁소소리처럼 유연하지 못하다. 항상 비움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비움으로 채워져 있다. 이것이 자연의 퉁소소리와 인간의 퉁소소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인간의 퉁소소리는 희로애락·여탄변집·요일계태의 감정들로 꽉 채워져 고정되어 있다면 자연의 퉁소소리는 그런 감정으로부터 모두 벗어나 아주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렇다면 오른 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자연의 퉁소소리처럼 마음을 비웠을 때나 결국 가능한 일이 아닐까?

“모든 악기는 비워진데서 소리가 난다는 것에서 삶의 진리를 터득했다.”
“모든 악기는 공명이 있다. 그 공명은 악기가 비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꽉 차면 진동이 없다.
사람도 욕심으로 마음이 꽉 차면 진동을 못한다. 음악은 마음을 비우게 도와준다.
대체로 건강하고 장수하는 사람들은 자연과 끊임없이 진행되는 삶을 산다.
건강하려면 호흡이 중요하다. 노래를 부르면 호흡이 절로 된다.
특히 음악은 복식호흡을 통해 수승화강이 절로 된다.”  (원불교신문 원기 96년 1월 7일, 14면)